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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완전한 귀환의 기록
"시간과 공간이 씨실과 날줄처럼 엮여 짜인 화성행궁"
— 이선희 교수, 중앙대 교양대학 · 화성행궁 학술세미나 20251789년 정조대왕이 부친 사도세자의 능침(隆陵)을 수원으로 이장하면서 첫 주춧돌을 놓은 화성행궁. 조선 왕조가 전국에 조성한 행궁 가운데 가장 크고 격식 높은 이 공간은, 왕의 효심과 신도시 건설의 꿈이 하나로 응축된 역사의 현장이다. 1796년 600여 칸 규모로 완공된 이후 정조는 11년간 12차례 이곳에 능행을 거행했고,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이 궁궐에서 올렸다. 그러나 1905년부터 시작된 일제의 훼손과 1923년 경기도립병원 신축으로 인한 전면 철거는 행궁을 역사의 기억 속에만 남겨두었다. 1989년 시민들의 복원운동으로 시작된 긴 여정은 2024년 우화관(于華館)과 별주(別廚)의 복원 완료로 마침내 마침표를 찍었다. 119년의 침묵, 35년의 복원 여정이 이 한 곳에 담겨 있다.
수원인 웹진은 화성행궁의 탄생과 수난, 그리고 되살아난 현재의 세 장면을 통해 이 유산이 지닌 역사적 무게와 오늘날의 의미를 조명한다.
화성행궁의 기원은 정조 13년(1789)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조는 부친 사도세자의 묘를 경기도 양주에서 수원 화산(花山)으로 이장하며 새로운 도시 건설을 결정했다. 기존 수원 읍치를 팔달산 아래로 옮기는 대규모 신도시 계획의 일환으로 관청과 행궁이 함께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동헌(관아)으로 출발했으나, 왕이 능행(陵幸)할 때 머무는 임시 궁궐의 기능이 더해지며 그 규모와 격식이 날로 높아졌다.
1793년 수원이 화성유수부(華城留守府)로 승격되면서 행궁의 위상은 한층 격상됐다. 결정적 전환점은 1795년 을묘원행(乙卯園幸)이었다.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갑을 기념해 이곳 봉수당(奉壽堂)에서 성대한 진찬례(進饌禮)를 올렸다. 봉수당이라는 이름 자체가 '어머니의 장수를 빌다(奉壽)'는 뜻으로, 정조의 지극한 효심이 건물 명칭에까지 새겨져 있다. 이듬해인 1796년 화성 성곽 공사와 함께 행궁은 600여 칸 규모로 완공되었다. 강화행궁·남한산성행궁·온양행궁 등 전국의 행궁을 통틀어 규모와 격식 모두 으뜸으로 손꼽히는 공간이 탄생한 것이다.
정조는 이 행궁을 단순한 임시 거처 이상으로 구상했다. 훗날 왕위를 물려준 뒤 이곳으로 낙향하겠다는 원대한 뜻을 품고, 수도 한양의 궁궐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건립하도록 명했다. 1800년 정조의 갑작스러운 승하 이후, 순조는 이듬해 행궁 옆에 화령전(華寧殿)을 세워 정조의 초상화를 봉안했다. 이후 순조·헌종·고종에 이르기까지 역대 임금들이 이곳에서 머물며 정조의 유지를 이어받았다.
"화성행궁은 이중적 기능으로 공존해 왔다. 임금의 처소이면서, 수원 백성을 위한 관아였다. 현재 마주하는 모습도 역사적 변화 속에서 쓰임새가 다채롭게 변화해 온 공간이다."
— 이선희 교수, 중앙대 교양대학 · 화성행궁의 생활상 고증과 재현 학술세미나1905년, 행궁의 수난이 시작됐다. 통감부 체제 아래 화성행궁은 학교와 병원, 경찰서의 용도로 전용되기 시작했다. 봉수당은 자혜의원(慈惠醫院)으로, 낙남헌은 수원군청으로, 북군영은 경찰서로 바뀌었다. 1923년에는 일제가 행궁 일원을 전면 철거하고 경기도립병원을 신축했다. 600여 칸을 자랑하던 조선 최대의 행궁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일제의 통치 기구가 조선의 얼굴을 지우는 과정에서 화성행궁은 가장 전략적으로 훼손된 공간 중 하나였다.
그러나 역사는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낙남헌(樂南軒)과 노래당(老來堂) 두 건물은 철거를 면해 원형을 유지했고, 무엇보다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와 『정리의궤(整理儀軌)』에 당시 모습이 도면과 함께 상세히 기록돼 있었다. 이 기록들이 훗날 복원의 유일한 나침반이 되었다. 1989년, 수원 지역 시민들이 복원추진위원회를 자발적으로 결성하면서 35년에 걸친 긴 여정이 시작됐다.
1단계 복원 사업(1995~2002년)은 행궁의 심장부인 봉수당을 비롯해 중심 권역 482칸을 되살렸다. 2003년 개관식과 함께 시민의 품에 돌아온 화성행궁은 2016년부터 2단계 사업에 돌입했다. 일제가 경기도립병원으로 사용했던 서측 관아 권역, 즉 객사인 우화관(于華館)과 왕실 부엌인 별주(別廚)의 발굴·복원이 시작된 것이다. 2024년 4월 24일, 마침내 개관식이 열렸다. 복원 사업 착수 35년, 일제에 의한 훼손으로부터 119년 만에 화성행궁은 완전한 모습으로 귀환했다.
"화성행궁 내부 공간까지도 온전하게 회복하고, 특별한 관람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 오선화 문화유산복원과장, 수원시화성사업소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수원 화성은 동서양의 군사시설 이론을 융합한 독보적 가치로 국제 사회의 인정을 받았다. 18세기에 완공된 성곽임에도 기록의 완전성, 건축 기술의 혁신성, 공간 구성의 탁월함이 등재 기준을 충족했다. 『화성성역의궤』라는 방대한 공사 기록이 남아 있었기에 복원이 가능했고, 그 완성도 덕에 세계유산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완전한 복원을 마친 화성행궁은 이제 정적인 유산에 머물지 않는다. 매년 5월부터 11월까지 매주 금·토·일요일과 공휴일에 야간개장 프로그램 〈달빛화담(花談)〉이 운영된다. 조명과 미디어아트가 한데 어우러진 궁궐의 밤은 낮과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봉수당 앞마당에서 펼쳐지는 무예24기 시연, 낙남헌의 전통 공연, 행궁 곳곳을 수놓는 빛의 설치물이 역사의 공간을 현재의 감각으로 채운다. 2026년에는 관람 시간이 오후 6시부터 9시 30분까지로 운영된다.
내부 공간의 재현 작업도 본격화된다. 수원시화성사업소는 건축사·복식사·공예사 등 11개 분야 전문가와 함께 행궁 생활상의 고증 작업을 진행 중이다. 정조와 혜경궁 홍씨, 상궁들의 조선 시대 복식이 복원되고, 가구와 집기가 제자리를 찾아갈 때, 화성행궁은 단순한 복원 건축물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역사의 무대가 될 것이다. 수원시는 장차 유여택부터 낙남헌까지 복도와 난간으로 연결된 내부 동선을 관람객에게 완전히 개방하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이제 기억이 깃들 차례다.
화성행궁의 복원은 벽돌과 기와를 다시 쌓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제가 지우려 했던 조선의 정체성을, 시민들이 35년에 걸쳐 되찾은 집단적 의지의 역사였다. 정조가 꿈꿨던 600여 칸의 공간이 완전한 모습으로 귀환한 지금, 남은 과제는 외형의 복원을 넘어 그 안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채워 넣는 것이다. 복식과 가구, 동선과 의례가 제자리를 찾아갈 때, 화성행궁은 단지 바라보는 유산이 아니라 걸어 들어가 숨을 느끼는 살아있는 역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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